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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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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2,897회 작성일 19-03-2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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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성당 | 백가점성당 인물사

崔良业简历

 

于1821年          3月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于1837年(16歲)  6月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于1842年(21歲) 10月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于1844年(23歲)                 在长春八家子升执事。

于1847年(26歲)  8月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于1849年          4月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于1849年(28歲)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于1861年(40歲)    6月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于2016年         4月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한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연보

 

1. 신학생 선발과 마카오 유학


□ 1821년 3월 1일 :

최양업, 충청도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靑陽郡 化城面 農岩里)에서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

□ 1836년 2월 6일 :

부평 접프리 교우촌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서울 (금부)후동의 신부댁에 도착. 라틴어 수업 시작.

* 부친 최경환은 이후 수리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회장으로 임명됨

* 최방제 3월 14일, 김대건 7월 11일 후동 신부댁에 도착

□ 12월 2일 :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모방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함.

□ 12월 3일 :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의 인도를 받아 중국으로 출발.

□ 12월 28일 : 의주성․압록강․구련성을 거쳐 봉황성 변문(邊門 즉 柵門, 현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 도착. 조선 입국차 요동에 머무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를 만남.

□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심양 → 마가자 → 서만자 ?)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안의 “조선교구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 시작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위열병으로 사망.

□ 1838년 9월 14일 :

페레올(Ferrol, 高) 신부, 계승권을 가진 조선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됨(1943년 초에 가서야 교황의 칙서를 전달받음).

 

2. 마닐라 피신과 마카오 귀환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부대표 리브와 신부, 교장 칼레리 신부,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마닐라로 피신.

□ 5월 3일 : 도미니코회의 롤롬베이(Lolombey) 농장으로 이전하여 그곳에서 리브와, 데플레슈 신부 등에게 수학(11월 26일까지 약 6개월 반 동안 생활함).

조신철(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북경에서 보내온 1839년 3월 10일자(혹은 3월 11일자) 서한 1통을 받음

부친 최경환에게 쓴 서한이 조신철을 통해 조선에 전달됨

□ 11월 말 :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귀환.

□ 9월 12일 :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서울 포청에서 옥사 순교.

□ 1840년 1월 8일 :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마카오에 도착. 신학생들의 교육을 함께 맡음.

□ 1월 31일 : 모친 이성례(마리아),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

 

3. 마카오 출발과 소팔가자 도착

□ 1842년 7월 17일 :

브뤼니에르(de la Brunire) 신부와 최양업, 신학생 범(范) 요한과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 출발. 9월 11일 상해 도착

□ 10월 22일 : 요동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현 요녕성 장하시) 해안에 도착(1차 탐색 여행).

안내인 반 요한이 찾아서 보내온 백가점(白家店, 현 장하시 蓉花山鎭의 岔溝 인근 마을) 교우촌의 회장 두(杜) 요셉과 함께 세관에 감

□ 10월 26일 : 백가점 교우촌에 도착.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

□ 11월 :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양관(陽關)을 거쳐 페레올 주교가 있던 장춘 북쪽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

□ 1843년 12월 31일 : 개주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

□ 1844년 1월 14일 :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과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 계속.

* 김대건 : 훈춘을 거쳐 경원(慶源)으로 가서 3월 8일에 조선 교우를 만난 뒤 귀환

□ 12월 10일경 : 최양업과 김대건, 부제로 서품됨.

 

4. 사제 서품과 귀국 후의 선종

□ 1846년 1월 말 :

최양업 부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의 훈춘(琿春)으로 감(2차 탐색 여행).

□ 2월 중순 : 훈춘의 동강자(추정) 마을에서 경원 개시(慶原開市)를 기다리던 중, 만주 관헌에 체포되었으나 3일 만에 석방됨.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지도함.

□ 12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책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함(3차 탐색 여행).

병오박해(丙午迫害)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음.

□ 1847년 초 :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에 도착.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 7월 28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군함 글로와르(la Gloire) 호와 빅토리외즈(Victorieuse) 호를 타고 홍콩을 출발(4차 탐색 여행, 1차 해로 탐색).

□ 8월 10일 : 조선 고군산도(古群山島) 부근에서 난파하여 섬에 상륙. 조선에 남고자 하였으나 라피에르 함장이 이를 거절함.

□ 8월 26일 : 상해 도착. 이후 상해 서가회(徐家匯) 안에 있던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

□ 1849년 4월 15일 :

사백주일(卸白主日), 서가회 안의 대성당에서 예수회 회원이자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Maresca, 趙方濟)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됨.

□ 5월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귀환(5차 탐색 여행, 2차 해로 탐색).

□ 1849년 5월 :

상해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감. 요동의 차구(岔溝) 성당(현 장하시 용화산진)에서 사목 실습 시작

□ 6월 21일 : 차구 성당에서 만주의 부주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儀禮) 의식>에 대한 선서를 한 뒤 보좌 신부로 성직 수행.

□ 11월 3일 :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를 만남.

□ 12월 말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봉황성 변문으로 가서 조선 입국을 시도(6차 탐색 여행).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입국에 성공(13년 만에 귀국).

□ 1850년~1851년 : 전국의 다섯 개 도의 교우촌 순방

□ 1852년 8월 : 매스트르 신부, 고군산도를 거쳐 입국에 성공.

□ 1853년 여름~1854년 3월 : 진천 배티의 정주형 조선교구 신학교 교사 겸 지도 신부로 활동

□ 1854년 3월 이후 : 전국의 교우촌 순방

□ 1860년 : 죽림(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당해 숨어 지냄.

□ 1861년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 중 충북 진천 공소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푸르티에 신부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선종.

□ 11월 초 : 충북 진천 공소에 가매장된 시신이 배론[舟論]으로 옮겨져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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